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덴마크-노르웨이 왕국 (문단 편집) ==== 덴마크-노르웨이의 동군연합 해체 ==== 한편 틸지트 조약을 통해 마지못해 나폴레옹 1세의 대륙봉쇄령에 참여했던 러시아가 점점 경제적인 압박이 심화되자 대륙봉쇄령이 자국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이탈을 선언하자 이를 보복하기 위해서 AD 1812년 나폴레옹 1세가 러시아 원정을 감행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는 AD 1812년 7월 18일 '외레브로 조약'을 체결하며 그동안의 영국-러시아 전쟁을 종식시키고 다시 반(反) 프랑스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나폴레옹 1세의 [[러시아 원정]]이 엄청난 대재앙으로 끝나면서 AD 1813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스웨덴까지 반(反) 프랑스 동맹으로 돌아서는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 시작되었다. 특히 스웨덴은 섭정이 된 칼 요한 왕세자가 프랑스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스웨덴의 국익을 위해서 과감하게 나폴레옹 1세와 맞서기 시작했고 러시아에게 점령당한 핀란드를 되찾는 대신에 여전히 프랑스의 동맹으로 남아 있는 덴마크로부터 노르웨이를 빼앗을 계획을 추진했다. AD 1813년 10월 19일 나폴레옹 1세가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궁지에 몰렸다. 그동안 덴마크도 영국과의 포함 전쟁을 계속 치르느라 AD 1813년에 국가 파산을 선언하기도 할 정도로 재정 위기가 심화된 상태였기 때문에 프레데리크 6세는 AD 1814년 1월 14일 영국 및 스웨덴과 '킬 조약'을 체결하고 프랑스와의 동맹에서 이탈했다. 그리고 프레데리크 6세는 킬 조약을 통해서 우선 영국에게 북해의 [[헬골란트 섬]]을 양도하는 대신에 재정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군자금을 지원받는 조건으로 제6차 대프랑스 동맹에 참여하여 10,000명의 병력을 제공하기로 했다. 그리고 스웨덴에게는 노르웨이를 양도하는 대신에 북독일의 스웨덴령 포메른을 넘겨받기로 했다. 다만 노르웨이에 종속되어 있던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 페로 제도는 이번 양도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렇게 하여 AD 1380년 덴마크 국왕이었던 [[올루프 2세]]에 의해 성립되었던 덴마크와 노르웨이 간의 오랜 동군연합이 붕괴되고 새로운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왕국|스웨덴과 노르웨이 간의 동군연합]]이 성립되었지만 정작 노르웨이 의회는 이를 거부하고 나섰다. 이 당시 프레데리크 6세는 생존한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남계 혈통으로써 유력한 왕위계승 후보자였던 그의 사촌인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훗날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8세]])가 노르웨이 총독으로 임명된 상태였는데 노르웨이 의회가 독자적인 자유주의 헌법을 통과시키고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를 노르웨이 국왕으로 추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스웨덴군이 노르웨이를 침공하자 노르웨이도 오래 버티지 못한 채 8월 14일 '모스 협정(Convention of Moss)'이 체결하면서 자치와 자유주의 헌법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스웨덴과의 동군연합을 수용하였고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는 노르웨이 왕위를 잃고 덴마크로 추방되었다. 이후 올덴부르크 왕조는 글뤽스부르크 왕조로 넘어와 1905년에야 노르웨이를 되찾을수 있었다. 기묘하게도 이때는 스웨덴 베르나도테 왕조의 여계 자손이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